[염호다나] 봄
강물 마저도 꽁꽁 얼던 겨울을 지나 꽃샘추위를 거쳐 이제 막 봄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아기자기한 뭉게구름이 저들끼리 장난치고있는 파란 하늘도, 봄이 오고있음을 알리며 하나둘 세상 밖으로 나오려는 새싹들도 어느하나 부족함 없이 아름다운 날이었다. 분명 그랬는데..
" 그래서 니가 왜 여기있는지 100자 내로 해명해봐. "
" 다나 지금 상황에 납득이 안간다는건 너무나도 잘알겠는데, 권유받아서 나온거라고 백번도 더 말한거 같거든.. "
" 어쩐지 고위 간부라고 할때부터 삘이 오더라. "
물론 두 사람은 경찰청 내에서도 알아주는 절친이었다. 둘다 서장인지라 만날일도 많았고, 또한 통하는 이야기도 많았기 때문에 오히려 친하지 않았다면 그게 더욱 이상하게 느껴졌을 정도로 둘의 사이는 가까웠다.
하지만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직장을 통해서 알게된 사이었기 때문에, 술약속을 제외하고 단둘이 그것도 이런 대낮에 다른곳도 아닌 커피숍에서 만난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일이란 말인가. 누군가 마법이라도 부린것인지 다나와 염호는 지금 커피두잔과 책상을 사이에 놓고 서로 마주하고 있었다.
[염호다나] 봄
written by 슈가펌킨
사건의 발달은 이러하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자유로운 솔로 라이프를 즐기고 있던 다나는 다나의 엄마에 의해 반강제 소개팅을 잡게 되었고, 옷걸이를 들고 때리려 드는 엄마에 의해 결국 이렇게 자리에 앉아있게 되었다.
물론 다나만큼이나 폭력적이고 강제적이진 않겠지만은 염호 역시 별다를바 없이 집안의 권유에 의해 나오게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 그래도 다행이네. "
" 뭐가? "
다행이라고 웃으며 말하는 다나를 보며 염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도대체 이 상황 어디가 웃기단 말인가. 물론 다나를 오래전부터 짝사랑 해왔던 염호의 입장에서 지금과 같은 상황은 평생 살아가며 두번다시 오지않을 일생일대의 기회임였음에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혹시 다나도?
미묘한 다나의 반응에 자신도 모르게 기대하게된 염호는 마음을 졸이며 다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 소개팅든 뭐든간에, 어떻게 끝내야할지 고민 많이했었거든. 이전에 나갔던 소개팅도 썩 좋았던 편이 아니라서. "
그럼 그렇지. 무심함의 끝을 달리는듯한 다나의 말에 염호는 맥이 풀려버렸다. 자신이 너무 큰것을 기대한건가, 염호는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기 까지 앞으로의 여정이 얼마나 험난할지 예측할 수 있었다. 깜깜하구나 깜깜해.
" 그래도 이왕 나온거 분위기라도 잡아볼까? 우리 꽤 친하지만 서로에 대해 자세히 아는건 없잖아. "
" 뭐? 어떻게? "
" 지금 당장 스푼으로 돌아갈꺼 아니지? "
" 어.. 뭐 그렇긴 하지. "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라고, 다나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좋아하게 만들면 그만이었다. 위로의 말이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면 다나가 자신에게 가지고 있는 호감도는 0일지언정 마이너스는 아니었다.
그렇게 따지자면 가망이 아예 없는것도 아니니 지금 상황을 이용해보는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임에 틀림없었다.
" 그럼 좀 걸을래? "
" 그러던지. "
가볍게 식사를 마친 두사람은 가벼운 산책을 하기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푸릇푸릇한 새싹들이 가득한 공원 주위를 돌던 염호와 다나는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업무에 관한 이야기부터, 개인적인 일까지. 이제껏 둘사이에 한번도 오간적 없던 대화였기에, 둘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시간이 가는줄 몰랐다.
" 정말? 그런일이 있었단 말이야? "
" 응. 그땐 진짜 막막했는데.. "
" 이봐. "
그때였다. 갑자기 저들을 부르는 이질적이고 무례한 부름에 가장 먼저 반응한것은 다름아닌 다나였다. 방해에 의해 차마 말을 끝마치지 못했던 다나는 한숨을 쉬더니 천천히 고개를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돌렸다.
그럼 그렇지, 뒤를 돌자마자 보이는것은 여러명의 불량배들이었다. 다나가 귀찮다는 듯이 노려보자, 눈빛에 움찔한 불량배들은 살짝 뒤로 물러났다.
" 그래서, 니들은 또 뭔데. "
" 니들? 이 건방진게..! 얘들아 기분도 더러운데 처리해버려! "
" 하.. 진짜. "
허세에 살고 허세에 죽는다. 그들에게 자신의 앞에 있는 두 사람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삐뚤어진 인생에 삐뚤어진 삶을 살겠다 마음먹은 불량배들은 겁을 상실한건지 다나와 염호에게 달려들었다.
아아, 곤란한데. 스푼과 경찰은 어디까지나 선량한 시민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었기 때문에 이런 불량배 양아치들까지 돌보기에는 시간과 일손 그리고 비용 어느하나 빠지지않고 부족했다. 결국 참교육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한 염호와 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풀고는 저들에게 달려오는 이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
" 윽..! 니들 뭐야! "
" 누구긴 누구야. 스푼 서장이지. 아 얘는 경찰 서장. "
" 경찰입니다. 서까지 동행하시죠. "
" ! "
역시 인생은 타이밍이라 했던가. 시비 한번 잘못 걸었다가 큰 깨달음을 얻게된 불량배들은 염호가 부른 경찰들에 의해 경찰서로 이송되었고, 그렇게 큰 해프닝은 마무리 되는듯 해 보였다.
질보단 양. 필요 이상으로 많은 불량배들 탓에 지칠데로 지친 다나는 벤츠에 널부러지듯이 앉아있었다. 그런 다나를 보며 내심 귀엽다고 생각한 염호는 다나에게 다가갔다.
" 그래도 수고했어. "
" 윽.. "
" 다나..!? "
수고했다는 의미에서 다나의 어깨를 토닥이던 염호는 다나의 입술을 비집고 나온 신음소리에 일시적으로 얼음 상태가 되었다. 반면 저도 모르게 나온 소리였는지 염호 못지않게 놀란 다나는 토끼마냥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염호를 쳐다보았다.
" … 다친거야? "
" 도중에 잠깐 빡쳐서.. "
" … "
다친것이냐는 물음에 다나가 대답을 하자 염호는 잠시동안 아무말 없이 생각에 잠겼다. 무슨 생각을 그리도 하는건지 궁굼하던 찰나에 정신이 든 염호는 고개를 확 들어 다나의 손목을 잡고선 어디론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 어디가는거야. "
" 그냥 따라와. "
평상시라면 막무가내인 염호를 이미 한대.. 아니 열대정도 가볍게 때리고 남았을 시간이었지만, 앞선 싸움에서 힘을 다 빼버린 탓에 기운이 없던 다나는 그저 염호가 가자는 곳으로 말없이 향했다.
그렇게 도착한곳은 다름 아닌 염호의 집. 도대체 이곳은 왜 온거냐고 물을 새도 없이 염호는 계속 다나의 손목을 잡은 채로 집안으로 들어갔다.
" 벗어. "
" 뭐? 이 미친놈이? "
" 아 그런거 아니라고. 다쳤다며 치료는 해아할거 아니야. "
오히려 자신을 이상한 취급하는 염호탓에 다나는 괜히 열이 오르는듯 했다. 그렇게 하나둘 단추를 풀러 다나가 입고있던 와이셔츠를 반정도 걸쳐 벗자 피로 얼룩진 어깨가 드러났다.
" 아.. "
다나의 상처를 보자 화가 치밀어 오르는듯한 기분을 느낀 염호는 한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마른세수를 한 뒤 구급상자를 들고는 다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의자를 빼들어 다나를 앉히고는 말없이 치료를 해주기 시작했다.
소독약이 상처에 닿자 움찔거리는 다나를 보며 염호는 저 또한 마음 한켠이 아파오는듯 했다. 언제나 강한 모습만을 보여주었던 그녀였지만,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은 인류 최강, 금강불괴가 아닌 그저 자신이 짝사랑하는 상대일 뿐이었다.
지켜주고 싶어. 물론 그녀가 충분히 강하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있었다. 하지만 지켜주고싶다. 다시는 이런일이 없도록. 그 마음 하나만으로도 더 이상 이 감정엔 다른 설명이 필요없는듯 했다.
" 다나. "
" 응? "
" 아니 다나씨. "
" … 뭐야. "
" 정말 미인이시군요. 스푼에서 일하신다고 들었어요. "
" 야..! 장난치는거야 뭐야. 뭐하자는.. "
" 처음본 그 순간부터 당신에게 반해버렸습니다. 그날부터 단 하루도 당신을 잊어본적이 없습니다. 알아요 이제 와서 이야기하기에는 너무나도 오랜시간이 지났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 긴 시간조차도 당신을 향한 제 마음을 바꾸지 못했어요. 그만큼 당신을 좋아합니다. "
" … "
염호가 말을 마치자 다나는 마치 넋이 나간 사람마냥 아무말이 없었다. 당연히 충격이 크겠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는 사실이었기에 염호는 다나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제 할말을 마친 염호는 붕대를 집어들고는 상처 부위에 조심스럽게 감아주었다. 그렇게 치료가 막바지에 접어들자 길고 긴 정적을 깬것은 다름아닌 다나였다.
" 진심이야? "
" 응. "
" 언제부터? "
" 처음부터. "
" 처음만났을때 "
" 응. "
" … "
" … 다나? "
앞서 말했듯이 재촉할 필요도 없었고, 재촉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먼저 말을 꺼내놓고 또 다시 침묵사이로 도망치려는 그녀를 보자 염호 역시 인내심에 한계가 오는듯했다. 그렇게 염호가 다나의 이름을 부르자 다나는 고개를 숙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 나도. "
" … "
" 나도 좋아. "
긍정. 긍정이었다. 어쩜 이런일이 있을 수 있지? 염호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워낙 표현이 없고 속을 알 수 없는 다나였기에, 이런 다나의 대답은 염호에게 있어서 놀랍기만 했다. 한참 허공을 응시하며 멍을 때리던 염호는 정신을 차리고는 그 사이에 빠르게 되물었다.
" 진심이야? "
" 어. "
그리고 더 이상 되묻는 일도, 번복도 없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염호는 다나의 작은 어깨를 껴안고는 조심스레 입을 맞추었다.
오늘은 아기자기한 뭉게구름이 저들끼리 장난치고있는 파란 하늘도, 봄이 오고있음을 알리며 하나둘 세상 밖으로 나오려는 새싹들도 어느하나 부족함 없이 아름다운 날이었다. 그런 아름다운운 날, 봄의 축복 아래에 그들은 연인이 되었다.
Fin